역사 속 위대한 제국들은 대부분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의 누적된 모순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로마는 외적보다 먼저 재정 파탄과 계층 분열로 속이 비었고, 영국은 전쟁이 아닌 과도한 금융 의존과 산업 공동화로 서서히 중간급 국가로 내려앉았습니다. 지금 미국을 바라보는 시선 중 가장 불편한 시각은 바로 이것입니다. 세계 최강국이 외부의 도전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정책들로 인해 균열을 키워가고 있다는 관측입니다.
관세라는 처방, 그리고 역설적 결과
2025년 4월 2일, 트럼프 행정부는 전 세계를 상대로 포괄적 관세를 부과하며 이 날을 '해방의 날(Liberation Day)'이라고 명명했습니다. 평균 관세율은 기존 2%대에서 18% 수준으로 급등했고, 중국산 제품에는 최대 145%의 관세가 적용됐습니다. 제조업 부활과 일자리 창출, 무역적자 해소를 내건 정책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선언과 정반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복수의 매체 분석에 따르면, 해방의 날 이후 미국 제조업 일자리는 8개월 연속 감소했으며,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제조업 일자리는 5만 4천 개 이상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한 보고서는 2025년 말까지 전체 고용이 약 50만 개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무역적자 역시 연간 누계 기준으로 전년보다 더 확대됐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요. 관세는 외국 기업이 부담하는 세금이 아니라 미국 소비자와 기업이 지불하는 비용입니다. 수입 원자재와 부품 가격이 오르면 미국 내 제조업체의 원가가 올라가고, 경쟁력이 오히려 약화됩니다. 여기에 정책의 예측 불가능성이 더해졌습니다. 수십 차례 번복과 유예를 반복한 관세 결정은 기업들의 투자 판단 자체를 마비시켰고, 설비 투자 의향은 대폭 꺾였습니다.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11월까지 9개월 연속 50 이하로 떨어져 위축 국면이 이어졌습니다.

달러 패권이 만들어낸 역설적 함정
미국의 구조적 문제를 이해하려면 달러 기축통화 체제가 가져온 특권과 그 부작용을 함께 살펴봐야 합니다. 1944년 브레턴우즈 체제 이후 달러는 세계 기축통화로 자리잡았고,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약 60%, 국제 무역의 약 40%가 달러로 이루어집니다. 다른 나라들이 수출을 통해 달러를 벌어야 하는 동안, 미국은 달러를 발행하는 것만으로 글로벌 구매력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특권이 오히려 재정 규율을 느슨하게 만들었습니다. 어차피 달러를 찍어 갚으면 된다는 구조 속에서 무역적자는 사실상 방치됐고, 강한 달러가 수입품을 싸게 만들자 제조업은 중국과 동남아로 빠져나갔습니다.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60년대 25%에서 현재 12% 수준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 결과로 쌓인 국가 부채는 2025년 현재 36조 달러를 넘어섰으며, 연간 이자 지급액만 9천억 달러에 가깝습니다. 이는 미국 국방비 전체를 웃도는 수준입니다. 주요 신용평가기관들은 미국의 신용 등급을 잇달아 하향 조정했습니다.
인구 지표가 보내는 경고
프랑스 역사학자 에마뉘엘 토드는 1976년 소련 붕괴를 예측할 당시 군사력이 아닌 인구 지표, 즉 유아 사망률과 기대수명의 변화를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는 2001년 저서 『제국 이후』에서 동일한 방법론으로 미국 패권의 약화를 경고했습니다. 당시에는 황당한 주장으로 여겨졌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지표들은 불편한 수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미국의 기대수명은 OECD 평균을 밑돌고, 약물 남용·자살·알코올 중독 등 이른바 '절망사(deaths of despair)'로 인한 사망자 수는 매년 수십만 명에 달합니다. 1980년대 고졸 노동자도 공장에서 일하며 집을 살 수 있었던 사회 이동성은 현저히 낮아졌습니다. 1980년에는 중간소득 가구가 주택을 구입하는 데 연봉의 3.4배가 필요했지만, 지금은 7배 이상이 요구됩니다. 대학 등록금이 연평균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17%에서 50%를 훌쩍 넘어섰습니다. 경제 규모 세계 1위의 나라에서 중산층의 삶이 수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력의 외형적 지표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내부 침식을 드러냅니다.
동맹 체제의 균열과 다극화의 가속
미국 패권의 또 다른 축인 동맹 체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NATO를 '돈 먹는 하마'로 규정하고, 방위비 미납 국가에 대한 집단 방위 의무 이행을 공개적으로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동맹의 핵심인 신뢰는 가격표를 붙이는 순간 성격이 달라집니다. 유럽은 2019년부터 '전략적 자율성'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하며 미국 의존도를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이 틈을 다른 행위자들이 채우고 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는 위안화·루블화 결제 비중을 확대하고, 독자적 결제 인프라 구축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브릭스(BRICS)는 2023년 정상회의에서 11개국을 새로 받아들이며 회원국의 GDP 합계가 G7을 넘어섰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결제에서 위안화 수용을 검토한다고 밝힌 것은 상징적인 신호입니다. 달러 중심의 페트로달러 체제가 처음으로 구조적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지정학 분석가 피터 자이한은 미국이 셰일 혁명으로 에너지 자급을 달성하고 제조업 리쇼어링이 진행되면서,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전 세계를 순찰할 유인이 사라지고 있다고 분석합니다. 이른바 '각자도생'의 시대, 즉 미국이 세계를 방치하는 단계로 전환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고, 우크라이나에는 직접 개입 대신 무기 지원에 머물렀으며, 중동 개입도 축소 기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이 읽어야 할 구조적 신호
미국의 변화는 한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한국은 GDP 대비 수출 의존도가 40%를 넘는 전형적인 무역 의존 국가입니다. 식량 자급률은 45% 수준이며 에너지의 95%를 수입에 의존합니다. 안보는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 공공재 공급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전환할 경우, 이 세 가지 축이 동시에 흔들릴 수 있는 구조입니다.
국내 상황도 미국의 사례와 겹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은 중간 소득의 15배를 웃돌고, 사교육비는 2023년 기준 27조 원을 넘어 정부 교육 예산의 절반에 육박합니다. 서울대 합격자 중 강남 3구 출신이 25%를 차지하는 현실은 교육 기회의 집중이 계층 고착화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합계 출산율 0.72명은 세계 최저 수준입니다. 이러한 지표들은 미국이 쇠퇴 신호로 경험했던 것들과 구조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에는 다른 자산이 있습니다. 반도체·배터리·조선 등 핵심 제조업에서의 기술 경쟁력, 국민건강보험으로 담보되는 의료 접근성, 그리고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비교적 빠르게 극복해 온 사회적 적응력이 그것입니다. 문제는 이 강점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느냐입니다. 독일처럼 기술 직업을 사회적으로 존중하고 대우하는 문화가 없다면, 제조업 경쟁력은 세대 교체와 함께 희석될 수 있습니다. 싱가포르처럼 주거를 투기가 아닌 생활 기반으로 관리하지 않는다면, 청년 세대의 삶의 질은 계속 떨어질 것입니다.
미국 패권의 균열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80년간 국제 질서의 공공재 역할을 해온 체제가 흔들릴 때 그 파장은 무역과 안보, 금융 모든 영역에서 동시에 도달합니다. 역사는 준비된 사회에 더 많은 선택지를 줍니다. 외부 환경의 변화를 탓하는 것보다 그 변화에 앞서 체질을 바꾸는 것이 지금 한국에 필요한 일입니다.
댓글 (0)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