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찾은 여행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추는 곳이 있습니다. 높이 9.4미터, 362개의 화강암 벽돌로 쌓아 올린 원통형 석조물, 바로 첨성대입니다. 안내판에는 "아시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고 적혀 있고, 우리는 학교에서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구조물 앞에 서서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창문은 지상에서 4미터 높이에 뚫려 있고, 내부로 올라가는 계단도 없습니다. 현대의 천문대를 상상하고 간 사람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이 의문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첨성대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은 곧, 우리가 과거 하늘을 바라보던 방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현대적인 기준으로 과거를 재단해왔는지를 직면하게 됩니다.

천문대라는 정의 자체가 문제다
첨성대 논쟁에서 가장 자주 놓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천문대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적 질문 자체가 이미 현대적 관점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천문대는 거대한 돔 안에 정밀 망원경을 설치하고, 우주의 물리 법칙을 탐구하는 과학 시설입니다. 그러나 신라 선덕여왕 시대(632~647년)의 '천문'은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하늘을 관찰하는 행위는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징조를 통해 인간사와 국가의 길흉을 읽어내는 것이었습니다. 혜성이 나타나면 전쟁이나 왕의 죽음을 예고한다고 여겼고, 일식은 왕권에 대한 하늘의 경고로 해석됐습니다. 천문 현상과 지상의 사건이 서로 감응한다는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은 동아시아 전통 정치철학의 핵심이었으며, 왕은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하늘의 뜻을 읽고 백성에게 전달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첨성대를 현대의 천문대 개념으로 판단하는 것은 처음부터 비교 기준이 어긋난 것입니다.
학계에서 첨성대를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된 것은 1970년대 이후입니다. 천문대라는 통설에 구조적 의문이 제기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창문 아래쪽은 내부가 흙으로 채워져 있어 실제로 올라가 관측하기 매우 불편한 구조라는 점, 궁궐 인근 저지대에 위치해 하늘을 넓게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 등이 지적됐습니다. 이후 종교적 상징물설, 선덕여왕 신성화를 위한 기념물설, 부속 건물 잔재설 등 다양한 가설이 등장했고, 심지어 조경학 분야에서도 첨성대의 공간적 상징성을 다룬 논문이 나올 만큼 연구 영역이 넓어졌습니다.
천문대로 보는 근거도 만만치 않다
물론 첨성대를 천문대로 보는 근거 역시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첨성대의 '첨(瞻)'은 '바라보다', '성(星)'은 '별', '대(臺)'는 '높은 곳'이니, 이름 자체가 별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삼국유사》에는 "점성대(占星臺)"라는 별칭도 기록되어 있어, 점성 관측과의 연관성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김봉규 박사는 정황 증거 연구를 통해 천문대설을 뒷받침했습니다. 첨성대가 세워진 이후 신라의 천문 관측 기록이 급증하고 내용도 상세해졌으며, 당시 기록된 유성의 낙하 지점들이 모두 첨성대 주변으로 수렴한다는 것입니다. 관측의 편의성이 아니라 왕궁과의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한 위치 선정도, 당시 천문이 과학이 아닌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으로 설명됩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관점이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천문학자들이 '천문 관측용 우물'에 대해 언급했고, 아랍권에는 실제로 우물 형태의 천문 관측 시설 증거가 남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낮에도 별을 관측하기 위해 깊고 좁은 통 모양의 구조물을 사용했다는 것인데, 이 시각에서 보면 첨성대의 원통형 구조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실크로드를 통한 서방 천문학 지식의 유입 가능성과 맞물려, 첨성대가 단순히 한반도의 고유 문화만이 아닌 동서 교류의 산물일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달력 하나가 왕권이었다 — 역서와 권력의 관계
첨성대의 정체가 무엇이든, 이 구조물이 만들어진 시대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역서(曆書), 즉 달력의 정치적 의미입니다.
오늘날 달력은 날짜를 확인하는 도구에 불과하지만, 전통시대 동아시아에서 역서는 왕권의 정당성 그 자체였습니다. 천체의 움직임을 정확히 읽어 백성에게 시간의 질서를 내려주는 '관상수시(觀象授時)'는 제왕의 가장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역서에는 단순한 날짜뿐 아니라 절기, 왕실 행사일, 길흉일이 모두 담겨 있었고, 이 역서가 정확하게 하늘의 운행과 일치해야 했습니다. 역서가 틀리면 왕이 하늘의 뜻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는 의미였고,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 관상감(觀象監)은 바로 이 역서 발행을 전담한 국가 기관으로, 영의정이 수장을 겸임할 만큼 위상이 높았습니다. 왕조가 바뀌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역법을 바꾸는 '개력(改曆)'이었습니다. 새 왕조가 새 달력을 반포한다는 것은 "이제 하늘이 우리를 선택했다"는 선언과 같았습니다. 심지어 중국 황제가 주변국에 역서를 하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황제국과 제후국의 위계를 확인하는 외교적 행위였습니다. 달력을 받는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간 체계에 편입된다는 뜻이었고, 조선은 자체적으로 역법을 계산하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습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면, 선덕여왕 시대에 대형 석조 구조물을 세울 만큼 천문 관측을 국가 사업으로 삼은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하늘을 읽는 능력은 통치의 정당성과 직결됐으며, 그 능력을 물리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물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천문대이든 상징물이든, 첨성대는 하늘과 왕권을 연결하는 장치였습니다.
일식·월식 기록의 또 다른 얼굴 — 관측인가, 계산인가
역사 기록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습니다. 삼국시대의 일식·월식 기록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수많은 천문 현상 기록이 담겨 있으며, 오늘날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그 실현율을 검증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의 일식 기록 실현율이 중국 사서보다 높다는 분석 결과입니다. 이것이 오랫동안 "신라의 천문 관측이 얼마나 정밀했는가"를 증명하는 근거로 활용됐습니다.
그러나 기록을 더 꼼꼼히 살펴보면 다른 해석의 여지가 생깁니다. 한반도에서는 보이지 않았을 일식이 기록에 등장하는 경우, 혹은 기록 날짜에 실제 일식이 발생했지만 한반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만 관측 가능한 경우가 존재합니다. 기존 연구에서는 이를 "관측 오류"로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이 직접 관측의 결과가 아니라, 역법으로 계산해 예측한 결과를 기록한 것이라면 어떨까요? 중국에서 비실현 일식 기록이 많은 이유 역시, 실제 관측이 아닌 역원(曆元) 개념에서 추보(推步)한 결과를 기록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삼국시대의 천문 기록이 "얼마나 잘 관측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정확한 역법 계산 체계를 갖추고 있었느냐"의 문제로 바뀝니다. 관측과 계산은 전혀 다른 능력입니다. 이 구분이 흐릿해질 때, 기록을 민족주의적으로 독해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폄하하는 편향이 생깁니다. 《삼국사기》 일식 기록에 대한 학계의 논의가 지금도 진행 중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왜 천문 기록이 줄어들었는가
《승정원일기》는 조선 시대 국왕 비서실의 기록으로, 거의 매일 작성된 방대한 1차 사료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흥미로운 현상이 관찰됩니다. 17세기까지는 혜성, 일식, 객성(客星, 새로 나타난 별) 등 천문 현상이 국가 중대사로 상세하게 기록되지만, 19세기로 갈수록 천문 관련 기록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입니다. 관측 자체를 게을리했을 가능성보다, 기록을 선별하는 기준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18세기 이후 조선에는 실학(實學) 사상이 활성화되고 서양 과학 지식이 유입됩니다. 1654년 시헌력(時憲曆) 도입을 계기로 서양 천문학의 정밀한 계산법이 조선 역법에 반영됐고, 일식과 월식이 예측 가능한 주기적 현상이라는 인식이 지식층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 관점의 변화가 기록의 변화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매일 해가 뜨는 것을 기록하지 않듯, 이미 예측된 현상은 특기할 사안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는 천문학에 대한 태도가 신비한 계시에서 계산 가능한 자연 현상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기록의 양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역사적으로 흥미로운 변화입니다.
우리가 과거를 볼 때 갖는 선입견
첨성대를 둘러싼 모든 논의는 결국 하나의 인식론적 질문으로 수렴됩니다. 우리는 과거를 볼 때 현재의 개념과 기준을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투영하고 있는가.
첨성대를 "천문대"라고 부르는 순간, 사람들은 망원경과 돔과 데이터 수집을 떠올립니다. 삼국시대 일식 기록을 "관측 기록"이라고 전제하는 순간, 당시 역법 계산의 역할은 사라집니다. 달력을 "날짜 표시 도구"로만 이해하면, 역서가 품고 있던 권력과 정치의 언어를 읽지 못합니다. 과거의 행위를 그 시대의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역사 해석의 기본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첨성대 하나가 잘 보여줍니다.
첨성대가 천문대였는지 아닌지, 현재로서는 어느 쪽도 결정적 증거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 불확실성은 유물의 한계가 아니라, 1,400년이라는 시간 차이와 시대적 맥락의 간극에서 비롯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간극 앞에서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서도, 그 시대 사람들이 하늘을 바라보던 이유와 방식에 진지하게 다가서려는 태도입니다. 하늘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 하늘을 읽는 언어는 시대마다 완전히 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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